[PLAY or MOVIE] #88. 더 휴먼스
불안과 공포가 스며든 현대 가족의 만찬

"괴물들이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같은 인간들이지."
토니상을 휩쓸었던 자신의 동명 희곡을 스티븐 카람 감독이 직접 연출하여 2021년에 발표한 숨 막히는 심리극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막내딸이 새로 이사한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낡고 어두운 이층집에 모인 블레이크 가족의 하루를 다룹니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를 나누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각자가 숨겨둔 재정적 위기와 불치병 그리고 직장에서의 해고 등 뼈아픈 현실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공포 영화처럼 연출된 이 기묘한 작품은 경제적 안정성을 상실하고 병들어가는 현대 중산층이 느끼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공간의 붕괴를 통해 시각화해 냅니다.
📋 작품 정보
- • 원작: 희곡 <The Humans> (스티븐 카람 작)
- • 영화: <더 휴먼스> (2021)
- • 감독: 스티븐 카람
- • 출연: 리차드 젠킨스 비니 펠드스타인 스티븐 연
🎭 무대와 화면의 비교 : 공간이 만들어내는 공포
시각적 억압: 얼룩진 벽과 그림자
감독은 자연광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 같은 아파트를 완벽한 절망의 무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벽에 번진 거대한 물 자국과 깜빡이는 전구 그리고 집 안을 덮치는 기괴한 그림자들은 가족들이 현실에서 마주한 불행을 그대로 시각화한 결과물입니다. 카메라를 벽 뒤나 복도 구석에 배치하여 인물들의 사적인 대화를 은밀하게 훔쳐보는 듯한 연출은 관객을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청각적 충격: 정체불명의 굉음
원작 연극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쓰였던 위층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쿵쿵거리는 소리와 세탁기의 기계음은 영화에서 더욱 극대화됩니다. 가족들이 서로의 약점을 건드리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마다 마치 집 자체가 비명을 지르듯 터져 나오는 이 굉음들은 현대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위협을 상징합니다. 소리만으로 공포 영화의 문법을 완성해 낸 탁월한 기법입니다.
🎬 명장면 : 정전된 집 안에서의 묵언
가족들이 모두 떠난 뒤 홀로 남은 아버지 에릭이 짐을 챙겨 나가려 할 때 집 안의 전기가 완전히 나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완벽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숨겨왔던 치부와 앞으로 닥칠 가난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꼼짝하지 못합니다. 무대 위 조명이 완전히 꺼진 뒤 느끼는 끔찍한 고독감을 영화 화면으로 그대로 옮겨오며 삶이라는 거대한 심연 앞에 홀로 선 가장의 비극을 소름 돋게 그려냅니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 가장 기괴한 지옥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민낯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