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or MOVIE] #120. 시라노
피터 딘클리지가 부르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순애보

"나의 말들이 그대에게 닿아 입맞춤이 될 수 있다면."
프랑스의 고전문학인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바탕으로 만든 무대 뮤지컬을 영상미의 마술사 조 라이트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겨온 작품입니다. 원작에서 유난히 큰 코를 가졌던 주인공의 설정을 신체적 왜소증을 가진 것으로 바꾸어 이야기의 현실적인 몰입감을 한층 끌어올렸습니다. 뛰어난 검술과 천재적인 시적 감각을 지녔지만 자신의 외모에 대한 깊은 열등감 때문에 평생 사랑해 온 여인 록산에게 차마 고백하지 못하는 근위대장 시라노. 그는 록산이 첫눈에 반한 젊고 잘생겼지만 말주변이 없는 신병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가슴 시린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며 슬픈 사랑의 대리인 역할을 자처합니다.
겉모습에 갇힌 인간의 불안함과 영혼을 관통하는 진정한 언어의 힘을 아름다운 음악과 유려한 미장센으로 엮어냈습니다. 왕좌의 게임으로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난 피터 딘클리지가 뿜어내는 깊은 슬픔의 눈빛 연기는 영화의 품격을 절정으로 끌어올립니다.
📋 작품 정보
- • 원작: 동명의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
- • 영화: <시라노> (2021)
- • 감독: 조 라이트
- • 출연: 피터 딘클리지 헤일리 베넷 켈빈 해리슨 주니어
🎭 언어의 힘을 시각화하는 화려한 미장센
편지가 춤추는 연출
조 라이트 감독 특유의 화려하고 정교한 세트 연출은 고전 연극의 우아함을 영화적으로 극대화합니다.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편지를 쓸 때 잉크가 번지는 모습과 종이가 바람에 흩날리며 록산의 방으로 전해지는 과정은 한 편의 환상적인 안무처럼 표현됩니다. 물리적인 신체의 한계를 넘어 오직 문학적인 언어만으로 공간을 넘나들며 사랑을 전달하는 시라노의 간절함이 아름다운 영상미를 통해 완벽하게 전달됩니다.
발코니 씬의 이중성
연극 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발코니 구조를 감독은 빛과 어둠을 활용하여 절묘하게 분리합니다. 발코니 위 빛나는 조명 아래 서 있는 록산과 멋진 외모의 크리스티앙 그리고 철저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진심을 읊조리는 시라노. 이 잔인한 시각적 구도는 진실한 내면과 화려한 겉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는 세 사람의 비극적인 운명을 뼈아프게 조명합니다.
🎬 명장면 : 눈 내리는 수녀원에서의 고백
긴 세월이 흘러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시라노가 수녀원에 머무는 록산을 찾아가는 결말 부분입니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록산이 건넨 과거의 편지를 보지도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완벽하게 암송하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평생 자신을 감동하게 했던 글귀의 진짜 주인이 시라노였음을 깨닫는 록산의 눈물과 끝까지 자신의 초라함을 부끄러워하며 숨을 거두는 시라노의 모습이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 슬프게 흩날립니다. 외모라는 껍데기를 벗고 마침내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가장 눈부신 이별의 순간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화려함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진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읊조린 활자의 무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