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or MOVIE] #82. 더 썬
플로리안 젤러의 무너진 가족과 소년의 비극

"머릿속이 너무 아파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치매 노인의 내면을 완벽하게 시각화한 명작 <더 파더>의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자신의 희곡 가족 3부작 중 두 번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부모의 이혼 후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 10대 소년 니콜라스와 새로운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아버지 피터의 갈등을 다룹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려 최선을 다하지만 어른들의 논리와 사랑 방식은 속이 부서져 내린 아들에게 전혀 가닿지 못합니다.
휴 잭맨의 무너져 내리는 부성애 연기와 로라 던의 절망적인 표정은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해체될 때 가장 여린 존재가 얼마나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는지 아프게 증명합니다.
📋 작품 정보
- • 원작: 희곡 <Le Fils> (플로리안 젤러 작)
- • 영화: <더 썬> (2022)
- • 감독: 플로리안 젤러
- • 출연: 휴 잭맨, 로라 던, 바네사 커비, 젠 맥그라스
🎭 무대와 화면의 비교 : 세탁기와 권총
공간의 대비: 완벽함과 어질러짐
감독은 인물의 심리를 공간의 상태로 표현합니다. 피터가 새로운 아내와 사는 아파트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밝습니다. 반면 소년 니콜라스의 방은 어둡고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으며 소년의 팔목에 그어진 흉터처럼 위태롭습니다. 물리적인 환경은 아버지가 제공할 수 있지만 아들의 무너진 마음이라는 공간은 결코 청소해 줄 수 없음을 무대 미술로 웅변합니다.
무언의 복선: 째깍거리는 불안
연극 무대의 소품 활용 방식을 그대로 가져온 세탁기 씬은 관객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합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일상적인 소음은 어느 순간 귀를 찢는 듯한 소리로 변하며 불안감을 증폭시킵니다. 또한 피터가 세탁기 뒤편에 숨겨둔 아버지의 낡은 엽총은 무대 위에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발사된다는 극작법의 원칙을 따르며 숨 막히는 긴장감을 조장합니다.
🎬 명장면 : 환상 속의 가족 식사
정신 병동에서 퇴원한 아들과 함께 세 식구가 모여 차를 마시는 영화의 후반부. 모든 갈등이 해결된 듯 평화롭게 웃으며 다음 여행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카메라는 문득 차를 끓이는 주방 쪽 빈 공간을 오래도록 응시합니다. 이어지는 거대한 총성. 우리가 보았던 평화는 현실이 아니라 부모가 간절히 바랐던 환상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 밀려오는 절망감은 뼈를 시리게 만듭니다.
"사랑만으로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는 가장 잔인하고 솔직한 가족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