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or MOVIE] #79. 드라이브 마이 카
하마구치 류스케와 체홉이 건네는 위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밤을 그저 묵묵히 살아가도록 해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모른 척했던 연출가 가후쿠.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 이후, 그는 히로시마의 연극제에서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게 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에 체홉의 희곡을 정교하게 결합한 이 영화는, 상실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3시간의 긴 위로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자동차라는 밀폐된 공간과 연극 무대라는 열린 공간을 오가며 언어와 소통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빨간색 사브(Saab) 900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닙니다. 마음의 문을 닫은 가후쿠와 그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가 서로의 상처를 공유하고 치유해 나가는 '움직이는 고해성사소'입니다.
📋 작품 정보
- • 원작: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 (무라카미 하루키) + 희곡 <바냐 아저씨> (안톤 체홉)
- •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 •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 • 출연: 니시지마 히데토시, 미우라 토코, 박유림
🎭 STAGE vs SCREEN : 다국적 언어와 수어
무대의 실험: 소통의 불가능과 가능
영화 속 연극은 독특합니다.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그리고 수어(手語)를 사용하는 배우들이 한 무대에서 각자의 언어로 연기합니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들은 상대방의 눈빛과 호흡을 읽으며 기적처럼 소통합니다. 이는 "말이 통한다고 해서 마음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합니다.
스크린의 침묵: 홋카이도의 설원
가후쿠와 미사키가 홋카이도의 설원을 향해 달리는 로드 무비 시퀀스. 차 안의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목소리(대본 리딩 녹음)는 죽은 자와의 대화처럼 들립니다. 눈 속에 파묻힌 미사키의 옛집 앞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죄책감을 털어놓고 포옹할 때, 배경에는 아무런 소리도 음악도 없습니다. 그 압도적인 침묵만이 그들을 위로합니다.
🎬 THE SCENE : 소냐의 수어 독백
영화의 엔딩이자 연극의 엔딩. 말을 못 하는 배우 이유나(박유림)가 수어로 바냐 아저씨(가후쿠)에게 위로를 건네는 장면. 소리 없는 손짓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그녀의 손이 가후쿠를 향할 때 관객은 전율을 느낍니다. 체홉의 텍스트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가장 아름다운 육체 언어로 승화되는 순간입니다.
"상처 입은 자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방식은 '말'이 아니라 곁에 있어 주는 '침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