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or MOVIE] #76. 비너스 인 퍼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한 욕망의 오디션

"하나님은 그를 벌하시어 한 여자의 손에 넘기셨다."
텅 빈 극장, 오디션이 모두 끝난 뒤 늦게 도착한 무명 여배우 벤다. 지쳐서 집에 가려는 연출가 토마스에게 그녀는 막무가내로 오디션을 보게 해달라고 조른다. 데이비드 아이브스의 희곡을 거장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화했다. 등장인물은 단 두 명, 장소는 극장 무대 하나뿐. 하지만 96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지는 두 사람의 역할극은 지배와 피지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관객의 넋을 빼놓는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어원이 된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를 액자식 구성으로 차용했다. 단순한 오디션이 어떻게 권력의 전복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주는 심리 스릴러의 수작.
📋 작품 정보
- • 원작: 희곡 <Venus in Fur> (데이비드 아이브스 작)
- • 영화: <비너스 인 퍼> (2013)
- • 감독: 로만 폴란스키
- • 출연: 엠마누엘 자이그너, 마티유 아말릭
🎭 STAGE vs SCREEN : 극 중 극의 경계
무대의 반전: 촌스러움과 요염함
처음 등장할 때 껌을 씹으며 천박하게 말하던 벤다는 대본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19세기 귀부인으로 완벽하게 돌변한다. 무대 위에서 순식간에 바뀌는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은 연출가 토마스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홀린다. 여배우가 가진 '변신'의 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스크린의 밀도: 2인극의 에너지
로만 폴란스키는 이 2인극을 영화로 옮기면서 카메라를 제3의 관찰자로 활용했다. 배우들의 표정을 극도로 가까이서 잡아내어 미세한 권력 이동을 포착한다. 처음에는 심사위원석에 앉아 거만하게 굴던 토마스가 점차 무대 위로 끌려나와 벤다에게 지배당하는 과정은 시각적인 쾌감을 준다. 감독의 부인인 엠마누엘 자이그너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스크린을 지배한다.
🎬 THE SCENE : 선인장 기둥
영화의 결말. 토마스가 무대 장치인 선인장 기둥에 묶여 있고, 벤다가 모피 코트를 입고 춤을 추는 장면. 현실의 연출가와 여배우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어, 토마스는 벤다(혹은 비너스)의 노예가 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바쿠스 축제'를 연상시키는 이 기괴하고 에로틱한 엔딩은 예술 창작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과 쾌락을 은유한다.
"감독은 신이 되려 하지만, 결국 뮤즈에게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